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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제목이 감춘 얼굴들: ‘사마귀’를 읽는 초점

by 95Lab 2025. 9. 27.

 

‘사마귀’라는 두 음절은 이상하게도 우리 귀에서 오래 잔향을 남깁니다. 소리가 짧아서가 아니라, 그 말이 불러오는 이미지가 단정하기 어려워서 그렇죠. 초록의 앞발을 세우고 기도하는 듯 보이는 포식자, 담벼락에서 느닷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눈, 그리고 난초(卵嚢)라 불리는 독특한 알주머니. 드라마는 이 단어를 연쇄살인마의 표식으로 적극 활용합니다. 하지만 정작 제목이 품은 층위—문학, 생물, 서사의 결 깊이—는 화면 밖에서 더 크게 울립니다. 이 글은 그런 이유로 세 가지 충격을 해부하려 합니다. 다만 한꺼번에 파헤치기보다, 첫 구획에서는 원작이 만든 감정의 파문과 실제 곤충 ‘사마귀’의 피붙이 비밀을 먼저 짚고, 다음 구획에서 드라마가 남긴 문장 하나를 중심으로 뒤틀린 관계의 윤곽을 드러낼 생각입니다.

 

 

먼저, 원작 소설의 충격부터. 많은 시청자가 드라마의 반전을 ‘보이는 충격’으로 기억합니다. 인물의 정체가 뒤집히고, 사건의 인과가 전복되며, 편집과 음악이 동시에 강박처럼 밀려와 가슴을 쥐어짜죠. 그러나 소설이 선사하는 반전은 조금 다른 결입니다. 속도보다 체온, 사건보다 정서, 지각보다 감응에 가까운 방향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주인공 강태주의 내면은 단순한 서술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가 천천히 적셔 들어가는 용액처럼 작동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는 ‘무슨 일을 겪었는가’의 주체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장이 됩니다. 이때 반전은 폭죽처럼 터지는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방 안 구석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던 향이 문득 코끝을 장악하는 순간에 가깝습니다. 알고 보니 냄새는 늘 있었고, 우리는 이제야 그것을 언어로 인지할 뿐이죠.

 

 

그런 서사적 방식이 왜 중요하냐고요? ‘사건의 충격’은 쉽게 소모됩니다. 스포일러 한 줄이면 유통기한이 단축되기도 하죠. 하지만 ‘느끼는 반전’은 다릅니다. 인물의 감정선과 가치판단, 자기기만과 욕망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차곡차곡 쌓인 체험은 이미 독자의 몸에 들어와 있습니다. 결말을 알아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깊이가 번집니다. 심지어 반전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문장, 지나칠 때는 배경처럼 느껴졌던 장면이 돌연 전면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드라마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소설은 ‘그 일이 한 사람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붕괴시켰는가’를 되묻습니다. 이 질문의 방향 전환이 바로 첫 번째 충격입니다. 반전은 정보의 반전만이 아니라, 감정의 반전일 수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사마귀’라는 단어의 날카로운 외피가 어느 순간 촉감으로 변합니다. 껍데기를 만지는 일이, 내용의 체온을 확인하는 일이 되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자연계의 ‘사마귀’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충격은 생물학이 던지는 뜻밖의 혈연입니다. 많은 이가 사마귀를 우아한 사냥꾼으로 떠올립니다. 앞다리를 번개처럼 접고 펴며 먹이를 제압하는 자세, 삼각형 머리의 회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위장. 그런데 이 포식자의 가까운 친척이 바퀴벌레라니, 귀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혐오와 경외가 한 뿌리라니, 어느 쪽이 더 믿기 어려운가요. 얼핏 낯설지만, 흔적은 분명합니다. 번식 전략에서 두 생물은 닮은 방식의 장치를 씁니다. 암컷이 만든 난초, 즉 알주머니는 단단한 보호막처럼 작동해 다수의 알을 한데 묶고 건조나 포식, 기생의 위협을 견디게 합니다. 외부의 변덕을 밀어내고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이 작은 건축물은, ‘한 생명을 지키겠다’는 본능이 어떻게 구조로 응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건 이 유사성이 드라마의 핵심 주제와 알맞게 겹친다는 사실입니다. 혐오의 대상과 경외의 대상이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는 깨달음은, 우리 머릿속의 분류체계를 살짝 비틀어 놓습니다. 악과 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생각만큼 칼같지 않다는 감각이 스며듭니다. 우리는 범죄를 도려내야 할 ‘바깥’의 것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묻습니다. 그 경계선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가족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내가 올려다보던 영웅의 얼굴일 수도 있다고. 자연의 족보가 인간의 윤리적 족보를 은근히 비유하는 장면입니다. 사마귀와 바퀴벌레가 난초라는 건축물로 새끼를 지키듯, 인간도 각자 자기 삶의 난초를 짓습니다. 가면, 신념, 기억의 편집. 목적은 보호지만, 구조는 언제든 변질될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친연성은 또 다른 통찰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닮음’을 보통 겉모습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진짜 닮음은 기능과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포장지를 벗길수록 비슷해지는 세계. 이것은 서사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선악의 대비, 법과 범죄의 대립이 선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속으로 들어갈수록 인물들은 서로의 기능을 닮아갑니다. 추적은 집착과 유사하고, 보호는 통제와 닿아 있으며, 사랑은 소유와 흔들리는 경계를 나눕니다.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거울상들이 바로 그 ‘기능의 닮음’을 강조합니다. 원형이 있어야 모방이 가능하듯, 선한 동기도 어떤 순간에는 악의 전략을 빌립니다. 시청자가 불편함을 느끼는 대목이 바로 여기죠. 닮고 싶지 않은 것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보는 반전’이 ‘사는 반전’으로 바뀝니다.

 

 

사마귀가 기도하듯 앞다리를 접는 자세도 이중적입니다. 겉으론 경건해 보이지만, 실은 번개처럼 내리꽂기 위한 준비 동작이죠. 이 모순된 형상이 작품의 정조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정의를 믿는 표정과 내면의 사적인 복수심, 악인이 내뿜는 평온한 미소와 그 이면의 피비린 쾌감. 기도와 포획이 한 몸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제목이 왜 ‘사마귀’여야 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단어 하나가 세계관을 요약하는 사례입니다.

 

 

여기서 잠시, 난초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보호를 위한 건축이 시간이 지나 굳어지면 껍질이 됩니다. 껍질은 처음엔 생명을 지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장을 막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각자 지켜 온 신념과 기억이 바로 그런 껍질입니다. 안전을 위해 만든 서사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기 창고가 되죠. 원작 소설이 인물의 내면을 집요하게 비추는 까닭은, 그 껍질의 촉감을 독자에게 끝내 체험하게 하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태주의 심리 궤적을 따라가면, ‘나를 지키겠다’는 선언이 어떻게 ‘너를 해치겠다’는 가능성으로 이어지는지 아주 미세한 균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미세함이야말로 현실의 얼굴입니다. 현실의 비극은 대개 박음질이 튼튼한 곳이 아니라, 실밥이 풀린 것처럼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되니까요.

 

 

결국 첫 번째와 두 번째 충격은 서로를 비춥니다. 소설이 감정의 반전을 통해 인간의 껍질을 벗겨내면, 생물학은 족보의 반전을 통해 분류의 껍질을 흔듭니다. 하나는 깊이로, 다른 하나는 폭으로 우리의 상식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 두 움직임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 질문과 마주합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 특히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관계는 어떨까요. 그곳에서도 ‘닮고 싶지 않은 닮음’과 ‘보호라는 이름의 변질’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요.

 

 

이제 세 번째 충격으로 들어갑니다. 교도소 접견실, 면도날처럼 얇은 유리. 살인자 정희신과 그를 추적해 온 형사 차수열이 마주 앉습니다. 그리고 한 문장이 방의 공기를 바꿉니다.

 

'피냄새 난 좋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나던 냄새니깐.'

 

이 말은 플롯의 회오리를 넘어서, 관계의 정의를 다시 쓰게 만듭니다. 범죄자와 형사라는 익숙한 대립 구도가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사적이고 절대적인 끈으로 접합되는 순간, 우리는 법과 혈연, 공적 윤리와 사적 정동이 한 점에서 맞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하죠. 그리고 바로 그 충돌에서 ‘사마귀’라는 제목의 기의가 한 번 더 번역됩니다. 기도 자세처럼 보이지만 포획을 준비하는 앞다리, 보호를 위해 지었지만 어느새 성장을 막는 난초의 껍질. 이 작품이 반복해서 보여준 이중성의 도식이, 이번에는 모성으로 이동합니다.

 

먼저, 냄새의 선택을 보세요. 시각보다 후각은 훨씬 원초적입니다. 냄새는 기억을 거치지 않고 감각의 골목길로 직행합니다. 정희신은 “피”라는 단어를 통해 폭력의 흔적을 부르는 동시에, “탄생”이라는 단어로 생의 기원을 끌어옵니다. 두 세계를 하나의 감각으로 묶는 기술이죠. 그 결과 ‘피’는 상처의 표식이면서 출산의 냄새, 죽음의 기척이면서 삶의 태초가 됩니다. 한 단어가 상반된 두 상징을 동시에 웅변하는 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이 집요하게 밀고 가는 메시지—‘우리가 믿는 구분선은 생각보다 얇다’—을 정수로 압축한 순간이라 봅니다.

 

둘째, 이 문장은 권력의 방향을 바꿉니다. 접견실의 테이블 위에서 유리 너머에 앉아 있는 이는 구금된 범죄자입니다. 겉으로는 약자의 자리죠. 하지만 “네가 태어날 때”라는 회상은 단번에 구조를 전도합니다. 생을 준 자의 언어는 듣는 이를 유년으로 소환하고, 그가 쌓아 올린 자율성과 직업적 정체성을 순간적으로 무력화합니다. 그러니 이 대사는 협박이 아니라 회귀의 주문처럼 작동합니다. 모성의 언어를 빌려 타인의 윤리적 주체성을 흔드는 전략. 그 불편함이 화면 바깥의 우리에게까지 전염되죠.

 

셋째, 모성의 신성화에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과감합니다. 우리는 모성을 보호의 본능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물습니다. 보호란 무엇인가. 그 보호가 누군가를 ‘내 것’으로 묶는 구실로 변할 때, 그 순간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정희신은 탄생의 냄새를 쾌락의 냄새와 겹쳐 말함으로써, 모성의 서사를 자기합리화의 연료로 전유합니다. “네 탄생이 내 쾌락과 맞닿아 있다”는 암시. 이건 돌이킬 수 없는 균열입니다. 보호의 언어가 통제의 장치로 변질되는 순간, 사랑의 이름은 더 이상 안전을 약속하지 않죠.

여기서 다시 곤충 ‘사마귀’를 호출해 봅시다. 난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견고한 구조물이지만, 그 단단함은 동시에 ‘닫힘’입니다.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내부의 움직임을 제한하죠. 드라마 속 모성이 보여주는 장면도 비슷합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구축된 서사는 어느새 상대의 선택권과 도덕적 판단력을 봉인합니다. 더구나 정희신이 그 냄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닫힘은 열광으로 치환됩니다. 방어의 구조가 공격의 정동과 결탁하는 셈이죠. 이때 우리는 ‘사마귀’의 상징적 구조—기도와 포획의 동시성—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차수열은 어떨까요. 그는 법의 질서를 대표하지만, 그 질서가 가족이라는 혈연에 의해 교란되는 상황과 마주합니다. 직업적 정체성이 사적인 비밀로 흔들릴 때, 인간은 보통 두 길을 떠올립니다. 선긋기와 동화. 선긋기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선언으로 경계를 다시 긋는 일이고, 동화는 “그럼에도 피는 피”라는 체념으로 경계를 지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그 이분법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차수열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경계를 그리되, 그 선이 내 안의 어떤 욕망과도 닿아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의식’하는 길이죠. 다시 말해, 악을 추적하는 일이 악의 문법을 배워가는 과정일 수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그 감지를 스스로의 감시 장치로 쓰는 태도입니다. 이 윤리적 곡예가 드라마의 긴장을 지탱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네가 태어날 때 나던 냄새”는 단순한 반전의 증명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으로 들립니다.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복수의 코드로 읽혀야 한다는 선언. 사랑은 보호의 이름으로 폭력을 감추기도 하고, 정의는 응징의 열망으로 사적 복수를 은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청자의 감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불쾌함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더 정교한 분별을 요청하는 알람이죠. 우리는 누가 누구와 닮았는지, 무엇이 무엇으로 변질되는지, 어떤 말이 어떤 권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다시 더듬어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목 ‘사마귀’를 다시 만져 봅니다. 첫 구획에서 우리는 소설이 만든 ‘느끼는 반전’과 곤충의 족보가 준 ‘분류의 반전’을 살폈습니다. 이번 구획에서 접한 건 관계의 반전, 곧 모성의 탈신성화입니다. 세 반전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우리 판단의 자동화를 흔듭니다. 감정—분류—관계. 이 세 층위가 동시에 진동할 때 작품은 단지 ‘충격적인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사고를 요구하는 이야기’로 격상됩니다. 그래서 ‘사마귀’는 오래 남습니다. 반전의 깜짝쇼가 아니라, 반전 이후의 생각을 우리 각자에게 남기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져갈까요. 첫째, 반전은 정보의 요동만이 아니라 감정의 재배치일 수 있습니다. 둘째, 닮음은 겉보다 기능에서 드러납니다. 혐오와 경외가 한 뿌리일 수 있다는 자각이 세계를 덜 단순하게 만듭니다. 셋째, 사랑과 보호는 쉽게 폭력과 통제의 문법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좋아한다’고 말할 때조차 그 말이 누구를 묶고 누구를 풀어 주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챙기는 순간, 제목 ‘사마귀’는 더 이상 범인의 별칭이 아니라, 인간을 읽는 렌즈로 작동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마귀’는 무엇이었나요. 화면 속 살인자의 미소였을 수도 있고, 소설 속 인물의 무너지는 내면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교도소 접견실에서 흘러나온 한 문장—탄생과 살육을 한 냄새로 묶어 버린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어 온 분류표는 손때 묻은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는 연필의 낙서라는 사실. 그 연필을 잡고 있는 손은 결국 우리 자신이겠죠. 그러니 문제는 늘 여기로 돌아옵니다. 나는 어떤 난초를 짓고, 어떤 앞다리를 세우며, 어떤 냄새를 좋아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 대답이 곧 나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세 가지 충격을 한자리에 놓고, 제목 ‘사마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정리해 봅니다. 한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죠. 당혹감이 강렬했거나, 생각의 틈을 만들어 주었거나. ‘사마귀’는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합니다. 반전의 순간은 강렬했고, 반전 이후의 사유는 느리지만 끈질겼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떠나보낸 뒤에도 우리는 이상한 감각을 붙들게 됩니다. 화면이 꺼지고도 손에 남은 냄새, 귀에 맴도는 문장, 눈앞에 겹쳐지는 앞다리의 실루엣 같은 것들 말입니다.

 

먼저, 난초의 은유를 끝까지 밀어봅시다. 알을 묶어 보호하는 그 작은 건축물은 지금 우리의 언어와 판단에도 있습니다. 나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급히 쌓은 원칙,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대입하는 유형화, 상처받지 않겠다는 결의로 만든 해석의 틀.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방풍벽처럼 유용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타인을 들이지 않는 껍질이 됩니다. ‘사마귀’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난초를 갖고 있었죠. 정의의 언어, 사랑의 언어, 가정의 언어로 만든 보호막. 그러나 보호가 지나치면 포획이 되고,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타인의 말과 표정은 구조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작품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비극의 씨앗은 그 지점에 뿌려져 있습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말들이, 결국 누구를 가두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장치.

 

다음은 앞다리의 자세입니다. 기도처럼 보이는 그 동작은 사실 ‘준비’의 자세죠. 준비는 방향이 모호합니다. 회복을 위한 준비일 수도, 공격을 위한 준비일 수도 있습니다. 작품은 인물들의 준비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묻습니다. 차수열의 준비는 법의 절차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었는가, 아니면 분노의 사사로운 칼을 더 잘 쓰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는가. 정희신의 준비는 자기 서사의 방호벽을 보수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면 새로운 피해자를 포획하기 위한 도구 손질이었는가. 우리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다음’을 준비한다는 말은 매일 입에 올리지만, 그 다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무엇을 만드는지, 어느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지 묻는 일은 드뭅니다. ‘사마귀’의 앞다리는 그래서 거울입니다.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 준비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상하게 하는가. 질문은 단순하지만, 대답은 쉽지 않죠.

 

그리고 냄새.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나던 냄새”는 충격적인 고백을 넘어, 감각의 방향을 바꾼 문장입니다. 대개의 서사는 시각 중심으로 소비됩니다. 반전도 대개 ‘보는 것’의 변주죠. 그런데 이 작품은 냄새를 호출합니다. 냄새는 경계선을 밟아 무력화하는 감각입니다. 시각이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동안, 후각은 거리를 삭제합니다. 불쾌한 냄새도, 그리운 냄새도 모두 곧장 몸에 들어옵니다. 작품은 이 감각을 통해 모성과 폭력, 탄생과 살육을 한 호흡으로 묶어 버렸습니다. 그 무자비한 결합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 속에 어떤 냄새가 섞여 있는지, 그 냄새가 타인의 호흡을 어떻게 점유하는지. 우리는 종종 사랑을 이유로 타인의 속도를 빼앗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그의 시야를 좁힙니다. 냄새의 은유는 그 압박을 드러냅니다. 보이지 않지만 침투하는 힘, 의식하기 전 이미 몸에 남아버리는 잔향. 그러니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냄새의 방향을 먼저 가늠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나가는가, 상대에게 달라붙는가, 공간을 환기시키는가, 아니면 방을 질식시키는가.

 

세 충격—감정의 반전(원작), 분류의 반전(생물학), 관계의 반전(드라마)—은 결국 하나의 과제로 모입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나누고, 느끼고, 맺는가.’ 반전이 유행처럼 소비되면 그저 놀이에 그치겠지만, 반전이 내 판단의 자동화를 늦추면 윤리가 됩니다. 섣불리 판정하지 않기, 말보다 맥락을 먼저 보기, 역겨움과 경외가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이 느린 태도가 이야기 바깥의 삶을 덜 잔혹하게 만듭니다. 작품은 결국 이 느림을 가르칩니다. 난초를 단단히 굳히기 전에 통풍창을 내는 일, 앞다리를 세우기 전에 아랫배의 호흡을 한 번 더 고르는 일, 냄새가 방을 채우기 전에 창문을 엽니다.

 

읽고 난 뒤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다시 보기의 요령을 제안해 봅니다. 먼저, 정보의 뒤집힘이 일어난 장면을 떠올리고, 그 장면 이전에 이미 깔려 있던 ‘느낌의 복선’을 찾습니다. 등장인물의 호흡, 카메라가 집요하게 들이대는 사물, 빛의 온도, 침묵의 길이 같은 것들. 이 작은 징후들이 감정의 반전을 예고합니다. 다음으로, 닮음의 패턴을 기록해 보세요. 선과 악, 추적자와 피추적자, 보호자와 가해자의 행동이 어디서 겹치는지, 어떤 말버릇이 서로를 반사하는지. 마지막으로, 관계의 언어를 분해합니다. “널 위해” “가족이니까” “정의를 위해”와 같은 문장들이 실제로는 무엇을 정당화하는지, 그 말들이 어떤 선택을 막는지 되짚는 겁니다. 이런 방식의 다시 보기가 끝나면, 당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도 비슷한 결이 보일 것입니다. 드라마의 도구가 삶의 도구가 됩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읽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는 즐거움의 매체니까요. 맞습니다. 다만 즐거움이 꼭 가벼움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작품은 즐거움과 사유를 동시에 건네고, ‘사마귀’는 그 두 가지를 꽤 높은 밀도로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떠올릴 때 단지 “재밌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때 왜 불편했지?” “내가 왜 이 장면에서 숨을 멈추었지?”를 묻게 됩니다. 불편함을 견디는 시간 동안, 우리의 판단은 한 톤 낮아지고 시야는 반 뼘 넓어집니다. 이게 작품이 남긴 진짜 선물이라 믿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마귀’는 무엇이었나요. 한때 혐오하던 대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순간일 수도 있고, 믿고 싶던 관계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 자신의 언어 속에서 포획의 논리를 발견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답을 내놓든, 그 대답이 곧 당신의 난초를 새로 설계하는 밑그림이 됩니다. 남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설계를 수정하는 일, 그것이 예술을 필요로 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죠.

 

마치기 전에, 한 문장만 더 건네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누군가의 숨을 막지 않도록, 오늘 창문을 연다.” 이 다짐이면 충분합니다. 거창한 정의의 맹세보다 미세한 환기가 더 많은 갈등을 예방하니까요. 그 작은 통풍창이야말로 ‘사마귀’가 우리에게 남긴 실용적 미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