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비만 약’으로 주목받던 GLP-1 작용제
‘기적의 비만 약’으로 주목받던 GLP-1 작용제는 체중 조절의 경계를 넘어,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 같은 난제 앞에서 오랫동안 막혀 있던 문을 열 것처럼 보였습니다. “혈당을 다루던 약이 뇌를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혹적이었죠. 하지만 막상 임상시험의 막이 오르자, 표면적 승패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결과 속에, 다음 단계로 가는 지도와 나침반이 숨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은 그 좌표를 따라가 보려는 시도입니다. 특히 ‘뇌’만 바라보던 시선을 ‘몸 전체의 대사’로 넓힐 때, 신경퇴행성 질환을 이해하는 문장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차분히 풀어보겠습니다.
‘기적의 약’의 좌절이 던진 질문들
먼저 가장 무거운 장면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 1회 주사형 엑세나타이드를 이용해 파킨슨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지 묻는 3상 임상시험이 깔끔한 승리를 거두진 못했습니다. 96주에 걸친 대규모 연구에서, 핵심 지표인 운동 증상 점수는 위약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죠. 안전성은 대체로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우리가 기다려 온 ‘질병 진행을 실제로 늦춘다’는 신호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그렇다면 GLP-1 계열은 뇌 질환에 소용이 없는가?”라는 단정이 빠르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이럴 때 오히려 더 섬세해집니다. 연구진과 여러 임상가들이 주목한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패가 ‘무(無)’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죠. 그들이 꺼낸 열쇠말은 ‘대사적 이질성’입니다. 같은 파킨슨병이라도, 참여자들의 대사 상태—체중, 인슐린 감수성, 당화혈색소, 염증 반응, 지방간 유무 같은 것들—이 다르면 약의 전신 효과 프로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적인 힌트가 체중 변화였습니다. 과거 2상에서는 약물군과 대조군 사이에 체중 변화의 격차가 제법 뚜렷했지만, 이번 3상에서는 그 차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체중이 약효를 대신 말해주는 지표는 아니지만, 두 시험의 대상자 구성이 대사적 관점에서 달랐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비춰줍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흥미로워집니다. 만약 GLP-1 계열의 ‘신경 보호’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강도로 나타나는 효과가 아니라, 인슐린 저항성이 있거나 당대사에 미세한 이상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잘 드러나는 조건부 효과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이 약이 파킨슨병에 듣는가?”가 아니라, “어떤 파킨슨병 환자에게, 어떤 대사적 배경에서 이 약이 듣는가?”로요. 이런 관점 전환은 듣기엔 사소해 보여도, 실제 임상 현장에선 대상자 선별, 용량 조절, 치료 목표를 통째로 바꾸는 힘을 가집니다. 그동안 ‘뇌 표적’이라는 말에 가려 잘 보지 못했던, 몸 전체의 대사와 뇌의 염증 반응이 맞물리는 커다란 축이 선명해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이 가설은 아직 사후 분석 단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첫째, 환자군을 대사적 특징으로 다시 나눠보자는 제안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예컨대 경계선 당뇨, 고인슐린혈증, 비알코올성 지방간처럼 뇌 바깥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엑세나타이드 같은 약물의 ‘간접적인 신경 보호’와 연결될 수 있다는 관찰이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얼마나 뇌로 들어가느냐’만 붙잡고 있던 습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GLP-1 약물은 뇌 침투가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초에서 염증을 줄이고, 미세혈관 환경을 개선하고, 면역 세포의 톤을 낮추는 방식으로 뇌에 간접 효과를 내는 경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질병의 속도가 완만해지는 변화가 미세하게 쌓인다면, 전통적 검사로는 쉽게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임상시험은 측정의 방식을 바꾸는 실험도 병행합니다. 병원에서 점수표로만 평가하던 시대에서, 웨어러블과 스마트폰 센서를 통해 보행, 미세진동, 수면의 질 같은 일상 데이터를 길게 모으는 방식이 섞이고 있죠. 환자가 체감하는 ‘좋아짐’이 실제로 어떤 패턴으로 나타나는지를 더 치밀하게 포착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늘이 정말로 움직였다면, 우리가 그 바늘을 볼 수 있는 도구를 먼저 갈아끼워야 한다는 자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한편, 같은 GLP-1 축 안에서도 약마다 결과가 엇갈린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분자 구조, 수용체 친화도, 용량·증량 전략, 제형, 복약 편의성과 순응도,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그 약을 쓰도록 선별됐는가’가 결과를 크게 바꿉니다. 한 줄로 세워 “된다/안 된다”를 재단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덧붙여, 이번 파킨슨 3상의 부정적 결과가 곧바로 알츠하이머 분야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약이 다르고, 질환의 병태가 다르며, 발병 초기냐 중기냐에 따라 염증·혈관·대사 축이 쥐고 있는 비중도 달라지니까요.
시야를 넓혀보면, 파킨슨병 자체가 하나의 이름 아래 여러 경로가 얽힌 ‘증후군’에 가깝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떤 환자군은 리소좀 기능 저하가 두드러지고, 다른 환자군은 특정 키나아스 경로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있죠. 그래서 요즘 신약은 GBA1 축을 끌어올리거나 LRRK2 축을 낮추는 식으로, 분자적 타깃을 아예 바꿔 겨냥합니다. GLP-1 계열이 주로 대사·염증·혈관이라는 넓은 축을 다스린다면, GBA1/LRRK2 표적 약물은 단백질 처리, 세포소기관 스트레스 같은 보다 세포 내적인 축을 노립니다. 어느 한쪽이 전부를 해결하진 못하겠지만, 서로 다른 톱니바퀴를 맞물려 돌리는 조합이 미래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2025년에 우리가 얻은 가장 값진 성과는 ‘효과가 없다’는 문장이 아니라, “효과를 보려면 무엇을 먼저 정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리스트였습니다. 대상자 선별 기준을 대사 지표로 재설계하고, 측정 도구를 일상 데이터 중심으로 보강하며, 뇌 침투만큼이나 말초-중추의 교차축을 탐색하는 일. 이 세 가지가 맞물려 돌아갈 때, 같은 약으로도 전혀 다른 곡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기적처럼 보이는 급격한 상승 곡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실패의 곡선에서 과학은 더 똑똑한 질문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뇌를 구하려면 뇌만 보지 말고, 몸 전체의 대사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바로 그 질문들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과학은 멈추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로의 시선, 그리고 ‘대사’라는 숨은 축
이제 고개를 들어 다음 장면을 봅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은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로 옮겨가고 있죠. 같은 GLP-1 축이라도, 분자와 제형, 투여 경로가 달라지면 생체 내부의 여정이 달라집니다. 주사형 엑세나타이드와 경구형 세마글루타이드는 구조도, 약동학도, 뇌로 가는 방식도 다릅니다. 알츠하이머의 병태생리는 파킨슨병과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시간표가 다르고 병변의 풍경도 다릅니다. 아밀로이드와 타우, 미세아교세포의 과민, 미세혈관의 미세한 기능 저하, 수면 중 생긴 노폐물의 배출 실패 같은 장면들이 서로 얽히죠. 이 복잡한 교차로에서 GLP-1 축은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요?
첫째, 대사와 염증의 다리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군을 들여다보면, 인슐린 저항성과 혈당 변동성의 문제, 체성 지방 분포, 간의 지방화와 같은 ‘몸 바깥’ 사건들이 ‘뇌 안’의 염증 톤과 호흡을 맞추는 흔적이 보입니다. 장-간-뇌로 이어지는 신호선, 즉 면역·호르몬·대사 물질의 미세한 교향곡이 깨졌을 때, 뇌는 조용히 오래 앓습니다. GLP-1 작용제는 혈당을 부드럽게 하고 식후 대사 진폭을 낮추며, 말초 염증을 은근하게 가라앉히는 쪽으로 점수를 쌓습니다. 이 변화가 뇌의 미세아교세포 활성도를 낮추고, 미세혈관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간접 점수를 줄 수 있다면, ‘뇌로 얼마나 들어가느냐’라는 질문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를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알츠하이머에서의 승부가 초기 단계, 즉 아직 신경망이 크게 무너지기 전의 긴 시간대에 벌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간접 효과의 누적은 의외로 큰 무게를 가질 수 있죠.
둘째, 표적의 시점입니다. 파킨슨병은 운동증상으로 진단되기까지 긴 전구기가 있고, 알츠하이머도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전에 이미 대사는 흔들립니다. 당화혈색소 같은 전통 지표만으론 놓치는 미세한 변동성—식후 혈당의 스파이크, 야간 저혈당의 잔흔, 수면 중 자율신경 톤의 기복—이 뇌의 만성 피로를 쌓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약을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선별의 기술로 이어집니다. 주로병원에서 하는 신경심리검사만으로는 늦을 수 있습니다. 연속 혈당 측정(CGM), 수면·활동량을 보는 웨어러블, 간단한 디지털 인지 테스트가 결합돼야 일상의 흔들림을 빨리 잡아낼 수 있습니다. 임상시험 설계도 이런 방향으로 수정돼야 합니다. 약의 효능은 때로 약 자체보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길잡이로’ 쓰였는가에 더 크게 좌우됩니다.
셋째, 병합의 시대입니다. GLP-1 축 하나로 만사를 해결하긴 어렵습니다. 알츠하이머는 아밀로이드·타우 축을 겨냥하는 항체·저분자와의 조합, 혈관 위험요인 관리, 수면·우울·사회적 활동 같은 생활의학 개입까지, 여러 톱니가 동시에 맞물릴 때 속도가 달라집니다. 그중 대사 축을 다스리는 약은 ‘기본 톤을 낮추는 베이스 라인’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염증의 바닥 잡음을 낮춰줄수록, 다른 표적 치료의 신호대잡음비가 좋아지겠죠. 그래서 차세대 연구는 단일 요법의 크고 선명한 효과만을 기대하기보다, 조합 요법에서 ‘1+1>2’를 끌어내는 설계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합니다. 초기 단계에서 작은 변화가 장기 결과에 어떻게 번져나가는지 모델링하고, 실제 환자의 일상 데이터를 통해 그 모델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넷째, 윤리와 접근성의 질문입니다. 설사 긍정적인 신호가 나온다 해도, 누구나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대사성 신약은 장기 복용이 전제되는 경우가 많고, 가격·보험·부작용 관리가 벽이 됩니다. 어지럼, 위장관 증상, 식욕 저하 같은 ‘살짝 불편한’ 부작용이 고령 환자에게는 기능저하로 번질 수 있죠. 그러니 임상 현장에서는 복약 순응도를 높이는 교육, 증상 발생 시 단계별 대응, 영양·단백질 섭취를 지키는 관리가 약만큼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약을 쓰는 기술과 약을 받치는 생활 기술이 한 세트로 묶여야 합니다. 대사라는 주제를 ‘수치의 조절’로만 보지 않고, 식사, 수면, 움직임, 스트레스 관리, 사교 활동 같은 일상의 리듬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합니다.
다섯째, 한국적 맥락입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앞으로 가파르게 늘고, 당뇨 전단계 인구도 적지 않습니다. 치매 국가책임제가 정착 단계에 들어섰지만, 조기 선별과 지역 기반 개입은 아직 더 촘촘해질 여지가 큽니다. 이 지점에서 대사-뇌 축을 보는 관점은 실용적인 의제를 만들어냅니다. 보건소·의원급에서의 간단한 위험도 분류, 연속 혈당 측정의 제한적 도입, 수면·활동량 기반의 저비용 디지털 선별, 동네 단위 운동·영양 코칭과의 연계 같은 것들이죠. 이런 ‘작은 레버’들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움직이면, 신약의 효과가 나오기 전부터 곡선의 기울기가 얕아질 수 있습니다. 신약은 그 위에 올라타 더 큰 차이를 만들어줄 수 있고요.
여섯째, 실패를 기록하는 문화입니다. 파킨슨 3상의 부정적 결과는 우리에게 연구 데이터의 투명한 공유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웠습니다. 부정적 결과가 빨리, 자세히 공유될수록 다음 설계는 더 똑똑해집니다. 하위집단에서 관찰된 작은 신호라도, 사후 분석의 한계를 명확히 적고 공개해야 지식이 쌓입니다. 연구자는 결과를 포장하지 않고, 임상의는 흥분을 경계하며, 환자와 보호자는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정보를 균형 있게 소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공동의 학습이 있어야 ‘헤드라인의 롤러코스터’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안정된 진전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문장으로 엮어보겠습니다. 2025년에 우리가 본 ‘의학의 기적’은 눈앞에서 번쩍이는 효과가 아니라, 질문을 고치는 힘이었습니다. “이 약이 듣느냐”라는 정면 질문을 “누구에게, 언제, 무엇과 함께 쓰면 가장 큰 도움이 되느냐”라는 입체 질문으로 바꾸는 힘 말입니다. 그 변환의 가운데에는 ‘대사’가 있습니다. 뇌는 몸에서 떨어져 떠다니지 않습니다. 식탁에서의 선택, 밤의 수면, 낮의 햇빛, 가벼운 산책, 연속 혈당의 작은 물결이 모여, 수년 뒤의 뇌를 빚습니다. 그렇다면 뇌 질환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돌파구는 어쩌면 이미 우리 곁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사를 다루는 기술, 일상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서로 다른 표적 치료를 조화롭게 엮는 설계의 기술.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번개가 아니라, 이런 기술들이 포개지는 순간에 조용히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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